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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마한의 꿈 나주 복암리 고분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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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마한의 꿈 나주 복암리 고분군

Mark-1 2017. 5. 7. 00:14

안녕하세요 마크원입니다.

 

업무차 나주에 들른김에 나주 복암리 고분군을 방문했습니다.

 

 

 

복암리 고분군은 원삼국시대~백제시대에 이르는 기간의

 

대표적인 마한 재지세력의 고분군으로 유명합니다.

 

96년 발굴조사 이래 여러차례에 걸쳐 조사되었고

 

마한의 고유 묘제인 옹관묘와 백제 사여품으로 보이는 금동식리(신발)가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이 되었습니다.

 

 

 

 

마한의 대표적인 분묘유형인 분구묘(봉분을 쌓아가며 매장시설을 켜켜이 쌓아올리는 묘형)

 

에서는 다양한 매장주체부가 조사되었고

 

하단부터 상단까지 대략 400여년의 묘제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유명합니다.

 

특히 초기 마한의 주구묘, 주구묘 주변의 옹관묘 배장

 

이후에는 주구묘를 확대하고 매장주체부를 지상에 두는

 

분구묘형태로 변화되는데, 이러한 형태는

 

경기 충청 서해안일대의 마한세력 묘제로

 

백제의 남정으로 마한세력이 영산강유역에 정착하여

 

채택한 묘형으로 추정됩니다.

 

주지하다시피 마한 54국에서 출발한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세력을 키워

 

서로는 마한 동으로는 예계세력을 축출하며

 

서서히 고대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백제가 경기 영서권까지만 확대된 시절에는

 

충청일대는 서해안 분구묘권, 충청내륙 주구묘(또는 주구없는 토광묘)권

 

으로 구분되는데요. 근초고왕 남정으로 충청지역이 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오자

 

토착 재지세력은 백제 중앙에 제후로 편입되거나

 

일부는 남하하여 영상강유역에서 세력을 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커져가는 백제와는 교류로서 우호관계를 지속했지만

 

외교적으로는 대중국은 물론 왜, 신라, 가야와도

 

지속적인 외교관계를 갖춰 백제를 견제하기도 한것 같습니다.

 

그러한 시대상황은 전라권 대형 고총 고분군

 

특히 전방후원분이나 분구묘에 드러나 있습니다.

 

 

 

 

주변국과의 교류의 산물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이를 해석함에 있어 백제와의 우호와 견제가 공존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일부는 백제의 우위아래 지방세력의 재편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내부 전시관은 복암리 96-3호분을 재현한 것으로

 

외형은 물론 가까이서도 관찰이 가능하며

 

주변의 테라스를 통해 위쪽에서 원거리로 관람이 가능합니다.

 

 

매장주체부는 백제의 횡혈식석실로 구성되며

 

내부의 시신은 옹관에 안치하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즉 외부의 묘제를 수욯하되 전통적인 장법을 혼합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횡혈석실의 형식상 하단 받침석이 장대석(넓고 넙적한 큰돌)으로

 

축조한 면이 일본 구주세력과의 연관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백제를 통한 왜와의 통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튼 마한세력은 왜세력과의 외교를 중시했던것 만은 확실합니다.

 

 

다양한 대형옹관이 복원되었습니다.

 

초기의 것은 생활용기인 옹의 형태가 점차 커지다가

 

이후에는 매장 전용옹관인 입구가 넓고 견부(어깨)가 사라진 형태로 변화합니다.

 

 

주변 생활유적으로 많은 고상건물(원두막형태)의 주공도 확인되었습니다.

 

 

매장전용 옹관의 모습입니다. 일반용기의 옹과는 다소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이른시기 즉 분구의 하부에는 마한의 전통성이 강한 형태에서

 

위로 올라갈수록(시기가 늦어질수록)

 

소위 백제화 영향으로

 

7세기대에는 소위 능산리형석실(백제 중앙 묘형)의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이 눈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완전히 같지는 않고 나름의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것도 있습니다.

 

고분군 일대는 생활유적과 함께

 

영산강 남단의 반남고분군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근거리에 위치한 두 고분군 즉 집단의 차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황을 고찰하고 있는데요

 

약간 더 이른시기부터 조영되기 시작한 반남고분군이 영산강 하류역의

 

높은 권력을 유지하다가 백제의 영역화 전략....즉 인근의

 

작은 집단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마한 내부세력의 권력분화를 획책하여

 

마한 재지세력의 연합을 붕괴시키는 전략이 이용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끝내는 복암리세력은 백제에 완전히 귀속되어

 

백제멸망기까지 지속되지만

 

이전 권력인 반남세력은 백제의 분열정책으로

 

와해되는 정치상황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과정적 측면에서 여러 해석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백제의 마한 병합전략은

 

무력병합과 지방세력의 포섭으로 요약되며

 

그중 일부에서는 포섭정책의 일환으로

 

내부분열책도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비슷한 규모의 집단 간 경쟁을 유발하여

 

채찍과 당근을 교체해가며

 

백제에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가는 방법이 아니었을까합니다.

 

물론 최후까지 포섭되지 못한 세력은 무력으로 병합하였겠죠.

 

 

 

고분군 전경의 전경입니다.

 

공주 부여 등지에 있는 대형 고총고분보다는 다소 규모가 작긴하지만

 

일반적인 고분보다는 매우 커

 

백제의 지방재편전략상 일부 권력층의 권위를 인정하였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특히 분구묘는 대표적인 가족장으로

 

개인장으로 분묘를 구성하는 백제의 묘제로 완전히 교체되지않고

 

백제멸망기까지 묘제가 유지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1500년 마한의 꿈을 간직한 고분군 근처에는 푸른 보리밭이

 

파도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있어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0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는

 

고사성어처럼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권력이 덧없음이 느껴집니다.

 

 

96-3호분 근거지 전경입니다.

 

평면 방형의 대형 방분이며 상부는 평평하게 잘려

 

피라미드의 윗부분을 자른 형태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체로 방분, 원분->제형분구묘->대형 방분 원분,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된다고 합니다.

 

 

 

 

96-3호분에 올라 옆의 제형 분구묘를 찍었습니다.

 

처음에는 방분(네모꼴 봉분)형태에서 단을 높이면서 뒷쪽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앞쪽이 넓고 높으며

 

뒤쪽이 좁고 낮은 형태의 평면 제형(사다리꼴)입니다.

 

 

윗부분이 약간은 뾰족한 형태도 있는데 규모는 조금 작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앞설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1박2일 1,000km를 달려준 내 애마 코씨에게 고마움을....^^

 

 

삼국시대 백제의 역사에 가려진 마한

 

그들의 시대를 담고있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 방문기였습니다.

 

p.s 원래는 반남고분군도 가려했으나 시간상 못갔습니다. 다음에 방문해서 이 포스트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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